아홉 시선이 만든 다정한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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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시선이 만든 다정한 영토

여성작가 9인이 삶과 시대를 바라본 서로 다른 시선이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에서 하나의 전시로 펼쳐진다. 기획전 《다정한 영토》는 회화와 사진, 조각, 설치, 자수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작가들이 구축해 온 예술세계를 소개한다.

전시는 ‘기원의 영토’, ‘생동하는 영토’, ‘투쟁하는 영토’, ‘유혹하는 영토’ 등 네 가지 주제로 구성됐다. 관람객은 제1·2전시실을 오가며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에서 출발한 추상세계부터 생명과 신체, 이주와 소속, 재료와 색채에 관한 작품까지 차례로 살펴볼 수 있다.

기원의 영토

‘기원의 영토’에서는 이성자와 홍승혜의 작품을 선보인다. 점과 선, 원, 격자처럼 단순한 형태가 반복되고 결합하면서 새로운 화면과 공간을 형성한다. 닮은 조형 요소를 사용하더라도 배치와 색, 작품의 형식에 따라 서로 다른 분위기가 나타난다.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성자는 꾸준한 창작 활동을 통해 독자적인 추상세계를 펼쳤다. 그의 작품에서는 점과 선, 원을 비롯한 기하학적 형태가 반복되고 서로 연결된다. 작품의 세계는 대지에서 도시로, 다시 우주로 이어지며 확장된다.

화면을 채운 형태들은 독립적으로 놓이면서도 서로 관계를 맺는다. 같은 원이나 선도 어느 자리에 놓이고 어떤 색과 만나는지에 따라 화면에 다른 질서와 공간감을 만든다. 관람객들은 반복되는 형태를 따라가며 작품이 불러오는 대지와 도시, 우주의 이미지를 천천히 살펴볼 수 있다.

홍승혜는 컴퓨터 화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픽셀에서 작업을 시작해 평면과 부조, 조각, 설치로 영역을 넓혀 왔다. 전시장에서는 〈별똥별〉을 비롯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반듯하고 규칙적인 형태에 여러 색과 입체적인 구성이 더해지면서 경쾌한 움직임이 드러난다. 작은 단위가 모이고 흩어지며 새로운 형상을 이루는 과정도 작품의 주요 볼거리다. 이성자의 점과 선, 원이 만들어 내는 추상적 공간과 홍승혜의 픽셀 기반 조형은 단순한 형태가 얼마나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생동하는 영토

‘생동하는 영토’는 정정엽과 장파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곡식과 씨앗, 벌레와 나방, 신체처럼 서로 다른 소재를 통해 생명과 몸을 바라보는 두 작가의 시선을 제시한다.

정정엽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존재에 주목한다. 흔히 볼 수 있는 곡식과 씨앗을 비롯해 작고 연약한 벌레와 나방이 작품의 중심에 자리한다. 익숙한 소재를 화면 앞으로 불러내 각각의 형태와 움직임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작고 평범해 보이는 존재가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관람객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 생명성에 머문다. 가까이에서 작품을 살펴보면 씨앗과 곡식, 작은 생명들이 지닌 서로 다른 모양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장파는 〈Gore Deco〉 등을 통해 여성의 몸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한다. 작품 속 형상은 아름답게 이상화된 인체와 거리를 두고 있으며, 내장을 연상시키는 형태와 과장된 표현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낯설고 강렬한 이미지는 매혹적인 느낌과 불편한 감각을 동시에 전한다. 여성의 몸에 덧씌워진 이미지와 그 안에 가려진 상처와 욕망을 드러내며, 몸을 바라보는 익숙한 시선을 다시 마주하게 한다. 정정엽이 작은 생명의 존재감을 전면에 세운다면 장파는 신체 내부를 연상시키는 표현을 통해 몸에 관한 시선을 흔든다.

투쟁하는 영토

‘투쟁하는 영토’에서는 장지아와 김옥선의 작품을 통해 신체와 욕망, 이주와 소속의 문제를 다룬다. 두 작가의 작품은 개인의 몸과 삶을 둘러싼 조건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김옥선은 국제결혼 가족과 이주민, 제주에 옮겨 심어진 식물처럼 새로운 장소에 정착한 존재들을 오랫동안 사진에 담아 왔다. 사진 속 인물과 식물은 서로 다른 배경을 지녔지만, 현재의 장소에서 삶을 이어 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함께 놓인다.

작품은 낯선 곳으로 이동한 뒤 한 장소에 자리 잡은 사람과 식물의 모습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관람객은 사진 속 대상을 바라보며 익숙함과 낯섦을 나누는 기준, 새로운 환경에서 형성되는 소속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존재들이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이주와 정착을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곁의 장면으로 드러낸다. 사진은 대상을 과장하기보다 눈앞에 세우고, 그 존재를 가까이 바라보게 한다.

유혹하는 영토

마지막 주제인 ‘유혹하는 영토’에서는 신미경, 함경아, 박미나의 작품을 소개한다. 제2전시실과 입구에 놓인 작품들은 재료와 제작 과정, 색채를 중심으로 저마다 다른 매력을 전한다.

신미경의 작품은 오래된 유물과 도자기, 고전 조각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재료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비누다. 익숙한 생활용품이 정교한 조각으로 변하면서 외형과 재료 사이에 예상 밖의 차이가 만들어진다.

처음에는 유물이나 도자기처럼 보이는 작품도 재료가 비누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다르게 다가온다. 작품 표면에 표현된 무늬와 질감, 조각의 세부를 가까이 살펴보는 과정에서 재료가 만들어 내는 독특한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함경아의 자수 작품은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표현으로 시선을 모은다. 작품은 작가가 구상한 도안을 바탕으로 북한의 자수 공예가들과 협업해 완성됐다. 도안이 전달되고 완성된 자수가 돌아오기까지 여러 경로와 사람의 손을 거치는 제작 과정이 필요했다.

멀리에서는 화려한 색과 전체 이미지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가까이 다가가면 촘촘하게 놓인 실의 결이 선명해진다. 한 땀씩 이어진 자수에는 작품을 완성하는 데 투입된 시간과 노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로 떨어진 사람들 사이의 거리와 여러 사람을 거친 제작 과정 또한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다.

박미나의 작품에서는 여러 색과 각각의 색에 붙은 이름을 살펴볼 수 있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색들도 나란히 놓이면 미세한 차이가 나타난다. 관람객은 색을 하나씩 비교하고 이름을 읽으면서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색채를 세밀하게 바라보게 된다.

세 작가의 작품은 비누와 자수, 다양한 색처럼 서로 다른 재료와 표현을 앞세운다. 신미경은 생활용품을 조각으로 전환하고, 함경아는 복수의 경로와 노동을 거친 자수를 제시하며, 박미나는 색의 차이와 이름을 나란히 펼쳐 보인다.

네 영토를 잇는 아홉 시선

《다정한 영토》는 여성작가 9인이 각자의 방식으로 마주한 삶과 세상을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전시다. 네 개의 주제는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구성되지만, 형태와 생명, 몸과 욕망, 이동과 정착, 재료와 노동, 색채에 관한 이야기가 전시실 안에서 이어진다.

점과 선, 원, 격자에서 시작한 관람 동선은 곡식과 씨앗, 벌레와 신체로 이어지고, 다시 국제결혼 가족과 이주민, 옮겨 심어진 식물로 확장된다. 마지막에는 비누 조각과 자수, 여러 색을 통해 작품의 재료와 제작 방식까지 살펴보게 된다.

하나의 삶과 시대도 작가의 시선과 매체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이 이번 전시의 흐름을 이룬다. 회화와 사진, 조각, 설치, 자수를 함께 배치해 관람객이 표현 방식의 차이를 직접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전시실에서는 강렬한 신체 이미지와 화려한 자수가 시선을 붙잡는 한편, 작은 씨앗과 식물 사진, 미묘하게 다른 색들은 발걸음을 늦추게 한다. 관람객들은 제1·2전시실을 이동하며 멀리서 작품 전체를 바라보고, 가까이에서는 형태와 표면, 실의 결, 색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미술 체험과 관람 정보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의 ‘코스모스’ 교육실에는 상시 미술 체험이 마련돼 있다. 전시 작품을 감상한 뒤 교육실을 함께 둘러보며 미술 체험을 이어갈 수 있다.

시설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관람시간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 마감관람시간 종료 30분 전
정기휴관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공휴일 휴관 기준월요일이 공휴일이면 그다음 날 휴관
위치경상남도 진주시 에나로128길 14
문의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055-749-5898

관람시간과 휴관일을 확인하면 전시실과 ‘코스모스’ 교육실을 보다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다. 《다정한 영토》는 아홉 작가의 서로 다른 작품을 따라가며 삶과 세계를 여러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된 기획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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