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머문 가족의 시간

오랜 세월 한 가족의 곁을 지킨 도자기와 꽃병, 사탕 단지와 어항은 단순한 생활용품에 그치지 않는다. 물건을 구입하고 사용한 시대의 풍경부터 가족이 함께한 일상, 세대를 건너 이어진 기억까지 고스란히 품은 기록이 된다.
경남 김해시 월담갤러리에서는 네덜란드 작가 코르둘라의 초대전 ‘Trapped in Time 시간 속에 갇힌 것들’이 열리고 있다. 1950년대 플라테일 도자기를 비롯해 부모와 조부모, 증조부모 세대에서 전해진 생활용품을 회화로 옮긴 전시다.
평범한 사물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과 가족의 역사로 이어지는지가 이번 전시의 중심을 이룬다. 작품 속 물건마다 구입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쓰임, 가족의 생활과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이 겹겹이 담겨 있다.
정교한 패널에 담은 사물의 표정
네덜란드 흐로닝언 출신인 코르둘라는 캔버스 대신 주로 40×50cm 크기의 정교한 패널을 활용해 작업하는 회화 작가다. 초기에는 자연 풍경과 동물, 초상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으며, 대상마다 다른 재질과 섬세한 질감을 회화로 포착하는 기법을 다듬어 왔다.
작업이 이어지면서 작가는 대상의 질감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더욱 깊게 표현할 수 있는 정물화에 몰입했다. 특히 비단과 모직, 레이스, 자수, 손뜨개처럼 성질이 서로 다른 직물의 결을 세밀하게 그리는 과정에서 네덜란드 전통 의상과 문화 요소에 관심을 넓혔다. 이러한 관심은 전통 오브제와 직물을 함께 배치한 독창적인 정물 연작으로 발전했다.
코르둘라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네덜란드 호르쿰에 있는 하멜 뮤지엄이었다. 이후 네덜란드와 한국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전통 기법과 각 문화에 축적된 기억을 비교하고 재해석하는 연작 작업을 본격적으로 이어갔다.
2024년에는 김해문화관광재단 웰컴레지던시의 첫 해외 입주작가로 선정돼 한국에서의 시각예술 창작 활동을 확장했다. 김해 장유 무계마을에 머물며 지역 풍경과 문화를 받아들였고, 김해 갤러리 무계에서 열린 2인전 ‘Placement’와 김해서부문화센터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등을 통해 정물 작품을 국내 관객에게 선보였다.
대칭을 벗어난 정물의 구성
코르둘라의 정물화는 전형적인 대칭형 삼각 구도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난다. 평면적인 시점이나 관찰자를 중심에 둔 정교한 구도를 사용하며, 서로 다른 직물의 재질과 전통 오브제를 세심하게 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전시장에서는 사물의 크기와 모양뿐 아니라 표면의 빛과 직물의 결, 물건 사이의 간격까지 면밀하게 구성된 화면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정물의 외형을 살피는 동시에 그 뒤에 이어지는 가족의 이야기를 차분히 따라가게 된다.
이번 전시는 모두 10개 주제로 구성됐다. 등장하는 사물은 특별한 예술품보다 가족이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고 간직했던 물건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각각의 물건에는 가족의 시작과 일상, 어린 시절의 장면과 세대 간 전승의 과정이 담겨 있다.
부모의 출발을 지켜본 도자기
첫 번째 주제인 흑백 플라테일 도자기는 1956년 결혼한 작가의 부모와 함께한 물건이다. 당시 작가의 부모는 현대적인 방식으로 집을 꾸몄으며, 검정과 흰색의 섬세한 선이 돋보이는 티코 플라테일 도자기를 사용했다.
이 도자기는 부모가 새로운 가정을 꾸리던 때부터 가족의 살림 속에 머물렀다. 이후 가족의 물건을 나누는 과정에서 작가가 보관하게 됐다. 한 가정의 시작을 지켜본 생활용품이 세월을 지나 회화의 소재가 된 셈이다.
세 세대의 기억을 잇는 그릇
꽃병과 사탕 단지를 다룬 작품에는 서로 다른 사연을 지닌 세 가지 물건이 등장한다. 시어머니가 남긴 화려한 꽃병, 시어머니의 어머니가 사용했던 초콜릿 접시, 손주들을 위해 사탕을 채워두었던 단지다.
꽃병과 접시, 단지는 각각 쓰임이 다르지만 가족이 함께 생활하던 시간을 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작품은 여러 세대를 거친 물건을 한 화면에 배치해 가족의 생활 흔적과 이어지는 기억을 보여준다.
금붕어의 기억이 남은 어항
어항을 소재로 한 작품은 작가가 세 살 무렵 큰이모할머니 집에서 금붕어를 바라보던 기억에서 출발했다. 어린 작가의 시선 앞에서 금붕어가 헤엄치던 어항은 시간이 흐른 현재 꽃병으로 사용되고 있다.
같은 물건이 세월에 따라 다른 쓰임을 갖게 됐지만, 어린 시절의 장면은 그대로 남았다. 어항에서 꽃병으로 달라진 용도는 사물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동시에 보여준다.
과수원의 하루를 담은 사과 바구니
사과 바구니에는 과수원을 운영했던 작가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담겼다. 온종일 과수원에서 일한 아버지는 어머니가 사과소스를 만들 수 있도록 사과 한 바구니를 가져다주곤 했다.
바구니는 사과를 담는 생활 도구였지만 작품에서는 부모의 노동과 가족의 식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가 된다. 가족에게 반복됐던 평범한 하루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정물화 속 기록으로 남았다.
네덜란드 장식 문화를 보여주는 금빛 도자기
금빛 플라테일 도자기 작품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도자기를 소재로 삼았다. 플라테일은 도기 표면에 그림을 그린 뒤 다시 구워 완성하는 방식으로 제작되며, 각 장식이 저마다 다른 특징을 지닌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당시 플라테일은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기보다 장식을 위한 물건으로 활용됐다. 가족의 소장품을 그린 작품이면서 당시 네덜란드의 도자기 장식 문화를 함께 살필 수 있는 주제다.
사진과 유품으로 완성한 바니타스
바니타스는 삶의 덧없음과 세속적 부의 상대성을 표현하는 정물화 주제다. 작가는 미술 교육을 받던 시절 바니타스 정물화를 그리는 과제를 수행하다가 할아버지가 꽃병이 놓인 탁자에 앉아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1920년 무렵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꽃병은 할머니에게 물려받아 작가가 보관하던 물건이었다. 작가는 이 꽃병을 그림의 소재로 삼고 옆에 꺼진 촛불을 배치해 작품을 완성했다.
오래된 가족사진 속 물건과 실제로 전해진 유품이 하나의 회화에서 다시 만난 작품이다. 사진에 남은 과거와 현재까지 보존된 사물이 연결되면서 시간의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청화 도기의 역사와 가족의 생활
붉은 열매가 있는 푸른 꽃병은 네덜란드 청화 도기의 역사와 가족의 생활을 함께 연결한다. 16세기 말부터 네덜란드에서는 푸른색으로 장식한 도기가 등장했으며, 중국 도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비교적 저렴한 대안으로 생산됐다.
이 도기는 델프트를 중심으로 발전했고 1650년부터 1750년 사이 전성기를 맞았다. 작가의 가족도 꽃병과 접시를 장식용으로 사용했다. 역사 속 도자기 문화와 한 가족의 생활용품이 한 화면 안에서 이어지는 작품이다.
친구의 선물에서 시작된 떠 있는 병
‘떠 있는 병’은 작가가 친구에게 선물받은 물건을 소재로 한다. 여러 개의 체인 고리가 서로 용접돼 병 하나를 받칠 수 있도록 만든 독특한 구조를 지녔다.
병을 받치는 구조는 사물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만든다. 가족에게 전해진 유품과는 다른 출발점을 지닌 물건이지만, 작가의 일상과 인간관계 속에서 기억을 간직하게 된 사물이라는 점에서 전시의 흐름과 연결된다.
약국에서 이어진 200년의 시간
씨앗병과 구리 주전자는 의사였던 작가의 증조할아버지가 운영한 약국에서 사용했던 물건이다. 정확한 용도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약 200년 된 물건으로 소개됐다.
작품에는 작가가 좋아하는 주황색 꽈리도 함께 등장한다. 증조부 세대의 약국에서 사용된 오래된 사물과 작가가 선택한 식물이 한 화면에 놓이면서 과거의 가족사와 현재의 창작이 맞닿는다.
작업실로 이어진 가족의 물건
쟁반과 둥근 꽃병, 플라테일 꽃병을 그린 작품은 어머니의 자매들이 사용했던 물건을 소재로 한다. 작가는 십 대 시절 쟁반 위에 작은 선인장 화분들을 모아두었던 기억을 작품에 담았다.
갈색 둥근 꽃병은 가족 여러 사람에게 차례로 전해진 뒤 작가의 작업실에 자리 잡았다. 작품 속 파인애플에는 별도의 상징이 담기지 않았다. 작업 당시 부엌의 과일 그릇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화면에 등장했다.
이 작품은 오랜 기억을 지닌 물건과 그 순간 주변에 있던 일상적인 대상을 함께 보여준다. 가족에게 전해진 사물이 현재의 생활 공간에 놓이고 다시 그림으로 남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실물 대신 그림으로 만나는 유품
이번 한국 전시에는 작품의 소재가 된 실제 물건들이 함께 오지 못했다. 작가는 평소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도 작품과 함께 전시하지만, 이번에는 물건의 수가 많고 손상되기 쉬워 가져오지 못했다고 작품 해설을 통해 설명했다.
관람객은 실제 도자기와 꽃병, 생활용품을 직접 보는 대신 작가가 그린 회화를 통해 사물의 형태와 질감을 살피게 된다. 화면 속 사물은 외형을 재현한 대상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각각의 작품에 담긴 설명을 따라가면 부모의 결혼 시절과 어린 시절의 기억, 조부모와 증조부모 세대의 생활이 차례로 이어진다.
전시 공간에는 화려한 사건보다 오랫동안 보관된 물건과 그 안에 쌓인 시간이 중심에 놓인다. 관람객들은 정교하게 묘사된 도자기와 직물, 생활용품을 천천히 바라보며 한 가족이 지나온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일상의 사물이 가족사가 되기까지
‘시간 속에 갇힌 것들’은 일상적인 사물이 한 사람의 삶과 가족의 역사를 어떻게 간직하는지 보여준다. 1956년 부모의 결혼 무렵부터 조부모와 증조부모 세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물건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생활의 흔적을 품고 있다.
물건은 가족에게 전해지는 동안 용도가 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어항은 꽃병이 됐고, 여러 가족의 손을 거친 둥근 꽃병은 작가의 작업실에 자리했다. 약국에서 쓰였던 것으로 전해지는 씨앗병과 구리 주전자는 약 200년의 시간을 건너 작품의 소재가 됐다.
오랜 세월 사용된 물건이 다음 세대로 전해지고, 다시 회화로 남는 과정 자체가 이번 전시의 중요한 이야기다. 작가는 가족의 사물에 얽힌 기억을 화면으로 옮겨 시간의 흐름과 세대의 연결을 표현했다.
전시 관람 정보
| 전시명 | 코르둘라 초대전 ‘Trapped in Time 시간 속에 갇힌 것들’ |
|---|---|
| 전시 장소 | 경남 김해시 월담갤러리 |
| 전시 기간 | 2026년 10월 15일까지 |
| 전시 구성 | 가족의 생활용품과 기억을 소재로 한 10개 주제의 회화 작품 |
코르둘라 초대전은 익숙한 생활용품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전시장을 채운 정물화는 사물이 간직한 가족의 기억을 차분하게 펼쳐 보이며, 오랫동안 곁에 둔 물건이 개인과 가족에게 어떤 기록으로 남는지를 전한다.
